📖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한강
🖋 말보다 느린 시, 기억보다 깊은 언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한강이 1990년대부터 써온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소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가이지만, 이 시집에서는 한강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깊고 조용한 내면을 지닌 존재인지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의 언어는 거창하지 않고, 오히려 낮고, 작고, 섬세하다. 하지만 그 섬세함 속에는 놀라운 강인함이 깃들어 있다.
시집의 제목에서부터 독자는 한 문장의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이 문장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시간을 물성화하고 감정을 시각화하는 시인의 감각을 단번에 드러낸다. 저녁은 왜 서랍에 있어야 했을까. 그것은 잊고 싶은 슬픔이었을까, 꺼내어 다시 보고 싶은 아름다움이었을까. 한강의 시는 바로 그런 열리지 않은 질문을 남긴다.
🌇 풍경과 마음의 경계
한강의 시에는 자주 풍경이 등장한다. 바람, 저녁, 나무, 달, 피, 물, 그림자. 그러나 그 풍경은 단지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이 투영된 심상의 풍경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감정의 극대화 대신 감각의 정적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 시집의 분위기를 대표한다.
“달이 떠 있는 저녁의 창문을 닫는다.
서늘한 기척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이런 문장은 설명하지 않고도 감정의 결을 보여준다. 말로 모든 것을 드러내는 대신, 빈 공간을 남기고, 그 틈으로 독자가 스며들게 한다. 이 시집은 그렇게 독자에게 ‘감정의 언어’가 아닌 ‘감각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 부드러운 상실, 다정한 슬픔
한강의 시는 고통과 죽음, 상실을 반복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날카롭거나 차갑지 않다. 오히려 조용한 체념, 부드러운 애도, 그리고 묵묵한 감내에 가깝다. 시인은 삶의 고통을 피해 가지 않고, 똑바로 응시한다.
하지만 그 응시는 비판적이지 않고 연민으로 가득하다. 살아가는 모든 것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이 책의 시편들을 읽다 보면, 마치 오래된 편지를 읽는 듯한 감정이 인다. 이미 떠나버린 누군가에게 쓰는 마지막 인사 같은 시들.
이 시집은 말하자면 산문이 하지 못한 일을 시로 대신한 책이다. 침묵해야만 했던 시간들, 말로 옮기기 어려운 감정들을, 시라는 형식 안에서 조용히 흘려보낸다.
🌌 문학과 삶 사이, 언어와 침묵 사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시집으로서 독특한 힘을 지닌다. 시인의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에서 끌어올린 감정과 장면들이지만, 읽는 이의 마음에도 묘하게 겹쳐지는 감정의 파문을 일으킨다. 시란 본래 고독한 형식이지만, 이 시집은 오히려 조용한 연대의 언어처럼 다가온다.
책을 덮고 나면 이런 감상이 남는다.
“삶의 언어는 때로 너무 투박해서, 우리는 시라는 형식이 아니면 어떤 감정을 전할 수 없는 순간을 가진다.”
한강은 그 순간들을 알아채고, 포착하고, 잊히지 않게 남겨주는 시인이다.
📌 이런 분께 추천해요
- 한강의 소설에서 느꼈던 감정을 더 섬세하고 조용한 언어로 느껴보고 싶은 분
- 설명이 아닌 느낌과 이미지로 다가오는 시를 좋아하는 독자
- 감정을 토해내기보다는 꾹 눌러 담는 시인의 내면을 천천히 읽고 싶은 분
- 상실, 기억, 고독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시를 찾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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